바람이 부는 모양

Trace of Wind

 

기민정 Key Min Jung

김혜나 Hyena Kim

오선영 OH, Sunyoung

최수인 Choi Suin

 

3 October 2019 – 3 November 2019
SPACE SO

 

바람은 들판으로 가 풀잎을 흔들고, 바다로 가 파도를 만든다.  

바람은 기온과 기압의 차이로 일어난 공기의 흐름으로, 반드시 속도와 방향성을 갖고 어디론가 향한다. 다분히 지구과학적 원리임에도 문학적인 표현으로 들리는 것이 바람의 매력이 아닐까? 이번 전시 <바람이 부는 모양>은 ‘언제나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바람의 심상에서 시작했다. 바람은 기분 좋게 불어오기도 하고 모든 걸 휩쓸어 가기도 한다. 소용돌이 모양이 되었다가 이렇다 할 모양 없이 미미하게 흩어지기도 할 것이다. 곱씹을 수록 심상들은 머리와 마음 속에서 소환되어 의미를 만들고, 바꾸고, 키운다. 그리고 하나의 모양으로 완결되지 않고 계속해서 다른 이미지들과 결합되고 섞이며, 저기에서 밀려와 저기로 밀려나가는 변주를 일삼는다. 어쩌면 바람의 이미지들을 연상하는 과정 자체가 바람의 속성과 닮았다. 주변의 것들을 움직이는 에너지인 동시에 주변에 의해 움직이고 변화하는 동세를 바람이라 부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바람을 유동성, 이동, 변화에 대한 은유로 삼고자 한다.

기민정, 김혜나, 오선영, 최수인, 네 작가의 회화는 꼭 그러한 바람의 심상을 불러온다. 전시장에 자리잡은 오선영의 나무들은 거센 바람을 맞으며 서있다. 화면에 불기 시작한 거센 바람은 흰 벽을 타고 이것저것을 뒤섞어버린다. 기민정과 김혜나의 회화에서 순발력 있게 그어진 듯한 선적 요소들은 일부 형태를 이루지만 그 형태의 윤곽이 뚜렷하진 않다. 거대한 바람이 지나간 후의 혼돈과 고요함이 공존하는 한 때처럼 느껴지면서도 거센 바람 같은 건 온 적이 없었다는 듯한 잔잔한 일상의 인상을 주기도 한다. 맞은편에 길게 늘어선 최수인의 풍경은 광풍에 가까운 모습이 돋보이는데 험난한 환경 속에서 한 인물이 겪는 사이코드라마가 펼쳐지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회화에서 돋보이는 방향성과 속도감이 느껴지는 붓질은 여러 겹의 물감을 쌓아 형태의 윤곽을 단단하게 만드는 대신, 형태와 형태, 색과 색 사이의 느슨한 틈을 만든다. 우리는 그 틈에서 화면 속 중심적 요소와 주변적 요소 간의 경계가 흐트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아가 사각의 프레임 너머 각각의 대기가 마주하며 잔잔한 충돌을 일으키고 호흡을 주고받기를 기대할 수 있다. 전시장 공간을 작가별로 나누지 않고, 12m의 긴 벽을 중심으로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섞어 배치하고 다양한 높낮이로 건 디스플레이는 작품들 간의 자유로운 연상을 극대화하고자 함이다.

붓질과 같은 표현적 측면은 작품의 내용적 측면과 공명하여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유동성, 변화에 대한 주제와 마주한다. 기민정 작가는 상반되는 두 존재가 공존할 때의 균형과 흔들림에 대해, 김혜나 작가는 일상의 산행 속에서 관찰한 자연 풍경의 매일의 인상에 대해, 오선영 작가는 문학에서 고른 단어의 친숙함과 그로부터 연상한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의 이중성에 관해, 최수인 작가는 자신과 주변의 인간관계를 털로 뒤덮인 한 인물과 외부세계의 자연물로 표현하며 그들의 유기적인 관계에 대해 그린다.

자연물을 대상으로 경유하는 이들의 회화는 경쾌한 풍경화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대상 그 자체보다는 개인적 기억과 감정의 여과를 거치고 상징과 의미를 탐색하는 과정에 몰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의 회화는 바람 부는 풍경을 그리려는 회화가 아닌, 보는 이들에게 바람을 가져오는 은유적인 풍경의 회화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휘어진 나뭇가지에서, 흩어진 나뭇잎에서, 헝클어진 머리칼에서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라고 느낀다.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붓의 흔적으로 가시화하고 장면으로 포착하는 작가들은 누구보다도 바람을 잘 타는 이들일 것이다. 비록 포착된 장면은 정지된 화폭이지만, 완전히 고정할 수는 없는 생동성을 간직한다. 그 운동에너지는 그 옆의 바람으로, 물결로 전달되며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실제 풍경 속 바람의 요소를 넘어 인지적인, 내면적인 변화들을 그리는 작품들을 통해 바람을 맞이하면서 또는 바람 사이를 통과하면서 보이지 않는 심상까지 포착해 보길 바란다.

기민정은 이중적이고 모순되는 것들의 공존과 갈등에 관심을 가져왔다. 마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부영사>*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올랜도>**는 상반된 것들의 경계와 그 경계의 뒤섞임에 대한 발상을 북돋았으며 지난 작업들의 배경이 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 과정 역시 상충하는 동시에 보완적인 두 인물의 협업으로 이해하고 있다. 색채를 담당하는 한 인물이 먼저 바닥에 놓인 화선지에 자유롭게 색채를 표현하고, 다른 인물이 그 색채들의 흔적 속에서 형태를 발견하고 혼란 속에 질서가 될 만한 윤곽을 먹으로 그려 형태를 정비한다. 작품의 색채와 형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영향을 주고받고 균형을 이루듯, 작가의 작업 과정도 자유로움과 즉흥, 정비와 규율이라는 상반된 영역 사이를 오가는 과정인 것이다. 작품의 지지체로 화선지를 선택한 점은 기민정의 최근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성이자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 <밤마다 굳어지는 돌>의 특징이기도 하다. 화선지는 아주 가볍고 얇은 종이로, 투과성이 높아 빛이 많이 들거나 물에 젖어 있을 땐 그림 넘어 뒷모습까지 고스란히 비춰낸다. 연약하기 때문에 외려 자유롭고 유동적인 속성을 가진 종이 위에서 상이한 두 요소가 균형을 이루고 부수는 경계적 상황이 드러나게 된다.

* 인도를 배경으로 계절풍의 지대한 영향을 받는 열대지방의 분위기 속 의문의 총격사건을 일으킨 프랑스 대사관 부영사와 집에서 쫓겨나 베트남에서 인도까지 걸어온 미치광이 여자 걸인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 남자로 태어났으나 성별이 여자로 바뀌었고 몇 세기를 초월한 삶을 산 올랜도라는 인물의 가상의 전기이다

김혜나는 최근 몇 년 동안 해가 떠있는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이 되면 작업실에서 나와 집 근처 작은 산을 걷는 일과를 반복해오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반복된 일과 속에서 얻은 매일의 감각과 경험을 내적으로 축적하여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다. 작가는 작업실에서 산으로 신체와 정신의 장소를 이동하면서 저물어가는 해의 모습과 빛의 인상을 감각한다. 또한 비슷한 곳을 자주 걷기에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는 산 풍경의 작은 변화들을 발견한다. 김혜나는 이러한 풍경을 감각하고 기억하되, 이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하거나 따로 스케치 해놓지는 않는다. 작가의 기억과 감정이라는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빈 캔버스를 마주했을 때의 즉흥과 작업실의 공기와 빛의 유동적인 흐름을 따라 그림을 그린다. 그렇기에 산에서 보았던 것들의 구체적인 형상이 단단한 윤곽이나 세밀한 묘사로 표현되는 대신, 붓질의 감각에 집중한 색색의 면과 선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에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Mushroom mountain>, <Windy>처럼 작가의 호흡과 붓질의 제스처에 따라 색들이 쌓이고 교차된 추상적인 화면으로 풍경이 완성된다.

오선영은 환상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숲, 비바람, 햇살 같은 단어를 골라 그림을 구성한다. ‘햇살’과 같은 단어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물을 필요가 없이 명확한 대상이지만, 이를 시각적 이미지로 변환할 때엔 모호하고 추상적인 이미지들의 연상작용이 일어난다. 과거 책이나 TV에서 보았을 법한 ‘햇살’의 관습적인 그리기 방식이나 특정한 미디어의 표현이 떠오르기도 하며, 머릿속 연상들을 조합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완성되기도 한다. 작가는 이처럼 단어들의 친숙함과 비현실적으로 그려진 이미지의 이질감을 작품에 이중적으로 포함한다. 그리기 방식에서도 분명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모호성을 포함한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이미지를 포착하는 과정을 마치 물감 덩어리가 캔버스에 날아와 붙은 듯한 표현방식으로 나타낸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품 <Calm will come one day>은 ‘비바람, 구름, 햇살, 나뭇가지’로 구성된 연작이다. 특히 이 연작에서는 음성 언어가 작품의 단초가 되어 ‘휘휙’ ‘슈-욱’과 같은 바람의 소리가 더해졌으며, 한 장소에 뿌리내린 나무가 겪는 변화무쌍한 변화를 세 개의 작품으로 보여준다.

최수인은 작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관계와 외부 세계에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는 사람의 감정적 상태를 그린다. 작품마다 등장하는 털 옷을 입은 듯한 인물은 작가의 심리적 모델로서,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위장을 하고 싶지만 잘 되지 않아 부끄러움을 느껴 방어기제로 온몸에 털이 많이 난 생명체다. 그를 둘러싼 자연적 환경은 그를 응시하는 여러 관계들을 극화해 표현한 것으로 거센 바람, 빠르게 흐르는 강물, 메마른 땅, 차갑게 얼어붙은 산 등의 척박한 환경으로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Lie>, <악역을 하는 자>처럼 작품의 제목은 그들의 관계를 일부 암시하지만, 자연물들의 일반적인 상징이나 인간관계의 구체적인 사건을 직접 표현하지는 않는다. 작가는 스케치나 이야기의 서사를 정해두지 않고, 그려진 요소들 간의 개별적인 성격과 위치, 동선 등의 조응관계를 고려하여 즉발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털이 난 주체뿐만 아니라 환경을 이루는 자연물들 또한 개별성을 가지며, 다른 대상들과 감정과 태도를 공유하는 유기적 관계 속에서 변형을 이룬다. 각 회화작품은 이들이 관계 맺고 있는 찰나의 순간을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이며, 이후로도 이야기가 계속 이어질 것이지만 미래가 정해지진 않은 유동적인 상태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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