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너머 타원의 경계 Horizon, and the Curtain of Ellipses
변상환 Byun Sanghwan
May 29 - July 12, 2025
물질의 힘과 감각
정현, 미술비평가
변용의 의지
변상환은 전형적인 구조로 형성된 미학적 관습을 분해한 뒤 그 안에 지극히 일상적인 요소들을 삽입한다. 그의 작업을 들여다보면 주로 일상에서 사용하는 사물, 도구, 기능성 상품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감을 보여주는 소재와 질료는 용기, 방수 도료, 부품, 통닭, 밀감, 생강, 아보카도, 보일러 연통 고드름, 물과 석고 등을 망라한다. 마치 기름에 튀긴 것은 모두 옳다는 유머처럼 작가는 가장 구체적인 일상의 사물들을 연금술사처럼 조리하고 오브제처럼 플레이팅한다. 1960년대 누보레알리스트들이 거대담론이 아닌 일상을 발췌하고 효용성이 사라진 사물의 삶 이후의 가능성을 들춰냈다. 대량생산된 산물들로 채워진 소비사회의 현장은 새로운 현실이자 물질에 깃든 기억, 시간, 가치가 빠르게 휘발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미술은 어떠한가. 알다시피 오늘의 미술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웃자란다. 실체가 모호한 시대, 비물질적 삶이 더 귀중한 시대다. 한병철은 “시간은 오늘날 모든 수준에서 잘게 토막 나있다”[1]고 강조한다. 정보가 실재보다 더 먼저, 더 빨리, 더 멀리 불특정한 다중에 도달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은 잡히지 않는 시간과 잡을 수 있는 반대편 시간 사이의 턴오버를 반복하는 형국처럼 보인다. 2010년 전후부터 한국의 동시대미술은 물질과 비물질을 적극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한다. 더불어 도시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풍경 담론이 무르익어간다. 가속화된 시간이 일상을 추월할 무렵, 새로운 풍경 담론은 속도에 저항하면서 인류학적 시선으로 삶의 주변을 매만지면서 자연과 문명, 역사와 제도, 물질과 비물질, 그리고 그 경계지를 다루는 시선이 채운다. 나아가 이 시기는 시각 중심에서 현실 내부로 몸의 기입을 실험하는 시기로도 해석할 여지가 있다. 본질적으로 미술의 창조 과정은 물질과의 투쟁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조형예술은 ‘손을 더럽히는 행위’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변상환의 판화 세계를 살펴볼 것이다. 그의 판화는 기존의 방식을 해체하여 기존의 평평한 원판 대신 작가가 감당할 수 있는 물질의 무게와 양감을 통해 프레스기를 사용하지 않고 모노타입 판화를 찍어낸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완벽하게 조절할 수 없는 예외적인 조건을 스스로에게 부가함으로써 구체적으로는 형식적인 판화술의 변용을 꾀한다.
무게와 힘
변상환은 이미지나 형상이 아닌 실제로 특정한 물질을 판화의 원판으로 사용한다. 원판의 조건 중 하나는 본인이 지탱할 수 있는 무게에 있다. 그러므로 인쇄 공정은 오롯이 본인의 힘을 통해 무게를 감당하며 몸과 물질이 중력과 장력을 받아들이는 시간으로 비유할 수 있다. 바슐라르는 판화가의 작업이 낭만주의 회화처럼 비물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판화가는 (외부적 세계가 아니라) 물질이 존재한다고 말한다.”[2] 바슐라르가 감지하는 판화는 물질의 질량과 힘의 무게와 속도에 의해 판독된다. 그가 물질과 손의 관계를 강조한 까닭은 아무래도 판화는 바로 작가의 손으로 무게를 가늠하고 질감을 감각하면서 누르는 힘을 통해 완성되기에 판화가 어떻게 실재에 다가갈 수 있는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변상환은 비정형적인 판화술을 통해 가상이 아닌 실재의 세계를 감각하는 것은 아닐까 상상하게 한다. 비정형적인 판화술은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1) 제철소에서 사용하는 자투리 형강을 원판으로 구입한다. 형강이란, 알다시피 흔히 H빔으로 불리는 건설 재료로 자른 면이 일정한 압연 강철재를 가리킨다. 2) 쓸모가 사라진 형강이 판화의 원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그에게는 15~25kg 정도의 무게가 적당하다. 3) 그다음엔 낡은 형상의 녹을 제거한 후 표면을 정렬한다. 4) 이어서 그 위에 방청페인트를 도포한다. 방청페인트는 철의 부식을 방지하는 기능성 안료로 작가가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질료이다. 여기에서는 인쇄를 위한 안료로 사용된다. 변상환의 판화술은 일반적인 조형예술 재료학의 영토 밖에 위치한다. 작가에게 적갈색 방청페인트는 제조업 기반의 산업국가인 한국사회의 단면을 비추는 기표로 작동한다. 일상에 흔히 사용되는 비-미술적 (또는 기능적) 질료는 실재를 구성하는 원소와 다름없어 보인다. 이 지점에서 다시 누보레알리즘을 소환해보자. 1960년대 서구의 아방가르드는 일상의 바깥에 위치한 미술의 순수성에서 탈주하여 현실 혹은 삶의 현장으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자기-지시적인 나르시시즘을 거절하고 그 자리에 현실을 구성하는 물질과 사물로 시야가 넓어지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세계를 판독하고 그 과정에서 발견된 이러한 변화의 요소들은 필연적으로 창작 과정의 변곡점으로 이어진다. 다시 변상환의 작업으로 되돌아가보자.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비-미술적 재료의 사용은 새로운 원판 인쇄 방식을 요구한다. 알파벳 모양의 형강 구조물을 원판으로 사용하기에, 판을 찍는 방법이 바뀐다. 인쇄 공정은 다음과 같다. 먼저 판화지에 인쇄할 영역을 표시한다. 형강의 중량에 동일한 무게를 더해 인쇄의 속도를 높인다. 1도 인쇄가 끝나면 곧바로 동일한 과정을 반복해 의도한 궤적을 따라간다. 변상환은 이렇듯 예외적인 판화 공정을 통해 표준화된 미술 산업 바깥에서 기능을 상실한 사물에 새로운 역할을 제안한다.
인류학적 풍경
변상환은 자신의 작업이 인류학자가 세계를 탐구하듯 도시 곳곳을 탐험하며 사소한 풍경을 채집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풍경은 단지 자연의 형태로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그에게 ‘풍경’이란 일상, 자연, 도시를 넘어 우주의 차원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존 버거의 풍경론과도 중첩된다. 요컨대 풍경이란 개념은 미적 대상에 그치지 않는 인류의 삶을 기억하기에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관계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변상환의 판화는 재현을 거절하되 그 자리에 물질의 무게, 경도, 질료의 흔적이 새겨진다. 판화지의 탄력과 광택의 차이도 작품에 따라 신중하게 다뤄진다. 나는 그의 판화에서 이미지보다는 물질의 성질이 더 민감하게 다가왔다. 2010년 전후 한국미술현장에서 비물질 담론의 증가와 더불어 도시 주변부를 탐구한 인류학적 태도는 풍경의 수사학적 가능성을 보여줬다. 당시의 풍경은 개발주의의 기슭에 자생하는 동식물, 사물, 자연, 기후, 대기와 같은 현상을 풍경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여 가속화된 기술 중심 정보화 사회로의 경계선 사이를 포착하려 했다. 이 정동의 풍경은 불안만큼이나 내뱉지 못한 기대를 품은 양가적인 상태였다. 아마도 포스트인터넷시대로의 변곡점에서 나타난 시대성이었을 것이다. 한편 변상환은 쓸모를 다한 도구를 판화를 위한 매체로 전유하여 미학과 기능과 가치를 되묻는다. 아름다움과 기능, 보는 것과 쓸모의 가치는 그의 작업 안에서 비교되는 게 아니라 어떤 세계를 구축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노동을 넘어서 무한히 다양한 사물을 제작하며 (중략) 인공세계를 구성한다.”[3]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은 생존에 있으며, 노동은 생존에 그치지 않고 세계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서 호모파베르(Homo Faber)는 도구를 통해 생존을 넘어선 인류가 궁극적으로는 예술 행위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틴어 파베르는 (faber)는 본래 돌이나 나무와 같이 단단한 물질로 작업하는 공작인이나 예술가를 지칭한다.[4]
관측과 실천의 힘
변상환의 판화 세계는 늘 설치를 동반해 왔으며, 이는 단순한 디스플레이의 방식과는 구별된다. 그는 전시 공간에 개입하여 기존의 공간성을 아예 지우거나 새로운 오브제를 삽입하여 공간/환경을 환기시킨다. 특히 이번 개인전 《지평선 너머 타원의 경계》(스페이스 소, 2025)에서의 공간 구성은 큐레토리얼의 성격을 가진다. 이번 전시에서 작업이 시각적 기호라면 공간은 이 기호들의 위치를 받치는 무대로 작동한다. 작품과 공간의 관계는 지속적인 전시를 통해 서서히 진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엇보다 판화를 보여주는 방식을 주목해야 한다. 액자와 같은 전형적인 미학적 틀을 따르지 않고 작가가 직접 목공 작업을 통해 맞춤형 틀을 제작한다. 그런데 이 틀 역시 평면이 아닌 곡면을 가진 입체물이기에 조각적인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사물과 작품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활용해 개념적인 실험을 전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의도를 고려하지 않기에 오히려 그의 작업은 전시장 내부에 새로운 공간을 구축한 후 그 내부에 비정형적인 형식의 작품이 품고 있는 의도와 의미에 맞는 각각의 공간을 제시하는 데 더 무게를 두는 듯하다. 개인전 《손은 눈보다 빠르다》(스페이스 소, 2022)에서는 주어진 전시 공간의 형태에 맞춘 곡면의 보라색 진열대를 제작해 그 안에 작품들을 위치시켰는데, 개인적으로는 마치 화려한 무대 위에 석고로 위장한 일상의 사물들이 퍼레이드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동시대미술에 있어서 미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인 사유를 요구한다. 하지만 반대로 그래서 더욱 직관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번 개인전 전시 표제에 등장한 ‘지평선’, ‘타원’과 ‘경계’라는 낱말들은 무엇을 표상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그의 또 다른 활동을 살펴보아야 한다. 변상환은 아마추어 암벽 등반가이기도 하다. 암벽 등반은 온몸으로 자연을 품는 과정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자연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하다. 줄에 의지하여 억겁의 시간을 버틴 암석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길이 없는 곳에서 경로를 찾아 신중하게 오르는 모습은 형강 판화의 과정과도 유사한 점이 있는 듯하다. 세계를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행위, 그곳에서 파노라마로 바라보는 풍경은 평면의 세계와는 분명 다른 차원의 경험일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풍경의 차원을 지구에서 그 너머로 나아간다. 경험과 상상의 차원이 곱해진다. 그렇게 작업은 빛의 굴곡을 따라 지평선을 넘어 빛의 시간을 좇아간다. 오디세이로 명명된 연작들은 마치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니 형강 판화의 과정이 마치 물리학 실험의 은유로 해석될 수도 있을 듯하다. 끝으로 변상환은 우리가 잠시 잊고 있던 실존하는 세계의 바탕이 무엇인지 질문하게 한다.
[1] 한병철, 『정보의 지배_디지털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김영사, 2023, 35-36
[2] 가스통 바슐라르, 『꿈꿀 권리』, 이가림 역, 열화당, 76쪽, 2001
[3]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역, 219쪽, 한길사, 2017
[4] 위의 책, 219쪽 (주석 1) 일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