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M, L, XL

김겨울  Winter Gyeoul Kim

December 12, 2024 - January 18, 2025

신비한 규모의 역설 - 김겨울 개인전 <S, M, L, XL>


구나연, 미술비평가


밤 하늘을 보면 점처럼 빛나는 별들이 있다. 겉보기 등급마다 색깔과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비슷한 크기로 점점 박혀 있다. 우리는 지구의 어느 구석에 서서 작은 눈으로 그저 반짝이는 별빛을 마주하지만, 그것은 거리와 크기를 상상하기 조차 힘든 항성 혹은 은하라는 우주의 잔상이다. 분명한 것은 수백 광년이 떨어진 그 거대한 존재가 나와 마주칠 때 대상의 크기는 나에 의해 ‘별’이라는 값으로 발생한다. 작고, 알맞고, 크고, 아주 큰과 같은 규모의 느낌은 수리에 기반한 절대적 값이 아니라, 각자의 감각적 계측 상황에 의해 매겨지는 상대적 값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적 계측과 상황이란 신체나 정서로 인해 매순간 달라지는 변화무쌍한 것이며, 나 혹은 대상의 움직임과 위치에 따라 서로의 규모도 끊임없이 달라진다.


김겨울의 전시 <S, M, L, XL>은 이렇게 변화할 수밖에 없는 주관적 스케일의 개념에서 시작된다. 전시의 제목이 말해 주듯 우리에게 익숙한 ‘사이즈’의 기호는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크기의 감각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지각의 방식을 표기하기 위함이다. 나는 여기서 ‘표기’라는 요소에 주목하고 싶다.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 뿐 아니라, 김겨울의 작업에서 ‘표기’와 같은 언어적 지향은 회화적 감각 전반에 깊이 작용하고 있으며, 회화가 지닌 재현적 ‘표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경로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상대적이며 감각적인 크기의 인식은 이번 전시는 <S, M, L, XL>를 그 필연적인 자의성 자체를 의미로 하는 기호로 환원한다. 이때 출현한 기호들은 인류에게 가장 단단한 구조인 언어의 체계와는 동떨어져 있다. 이것은 보편적 언어의 체계에 의문을 품고 우리가 세계를 발화하는 일반적인 방식의 틀을 깨는 회화의 기호이며, 신체에 의해 수시로 변모하는 현상에 대한 가변적인 음성이 된다. 김겨울은 통상적인 언어의 방식에서 벗어난, 기호 체계의 규범에서도 벗어난, 어떤 ‘보는 말’을 자신의 작업을 통해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김겨울이 <S, M, L, XL>에서 보여주고 있는 드로잉 작업은 나로부터 현현하는 규모에 기반한 ‘보는 말’과 같다. 작가는 전시 노트에서 “여느 때처럼 공원을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우뚝 서 있는 나이를 알 수 없는 오래된 나무들은 그 뒤로 멀리 보이는 무수한 고층 빌딩들의 높이를 무색하게 만들더니 동시에 나와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을 깨알같이 작게 느껴지게 했다”고 이야기 한다. 이는 말하자면, 과거 미니멀리즘 조각에서 우리의 위치와 눈길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파생되는 상태, 그리고 내가 그 상태를 유발하고 목격하는 능동적 존재라는 현상학적 판단을 상기시킨다.


김겨울은 도시에서의 경험을 통해, 미니멀리즘 조각과 마주할 때와 유사한 감각적 판단을 경험하면서, 자신과 세계의 존재를 새삼 응시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우리 안에 깊숙이 뿌리 박힌 관습적인 대상의 관념과 예측하지 못한 순간 체험하게 되는 부조리한 작용이 교차하며 일어난 균열은 결코 단정할 수 없는 세계와 마주한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로 인하여 파생된 세계이다. 경험하는 어떤 순간이 고정된 세계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내가 감각함으로써 세계의 일부가 생성되는 것이다. 예민한 감각의 일깨움으로 문득 현실의 완고함이 생경하고 새로운 것으로 경험되는 이 고요한 충격은 어쩌면 숨겨진 세계가 출현하며 작가에게 불러일으킨 정동(affect)과 같다.


그렇기에 김겨울은 우선 ‘S, M, L, XL’로 함축되는 크기의 기호를 불변이 아닌 가변으로, 고정이 아닌 운동으로 바꾼다. 이것은 그가 2022년 개인전 <보통 빠르기로 노래 하듯이>에서 스페인어를 휘파람 소리로 모방한 신비한 언어 실보 고메로(Silbo Gomero)를 언급한 것과도 관련된다. 그는 언어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언어라는 구조화된 기호 이면에 무한히 존재하는 ‘언어적인’ 무언가에 주목한다. 의미를 담고 있는 기표의 고정된 값이 아니라 기표 자체를 이미지로 변화시키면서, 기표 안에 응집된 무한의 의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S, M, L, XL”이라는 표기 속에 작은 것부터 큰 것이라는 성질이 함축될 수 있는 것처럼, 또 물수변의 세 점으로 “물”이라는 대상의 크나큰 존재를 함축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흘러가는 물을 세 방울에 담아 글자로 만든 과정이 아름답게 느껴졌”다는 김겨울의 설명과 같이, 기호의 속성이 지닌 힘은 다시금 형상으로 아우를 수 있는 이미지의 세계로 환기될 수 있다.


이 점에서 그의 드로잉은 모든 크기의, 넓이의, 거리의, 높이의, 수많은 무언가를 말할 수 있는 이미지로서의 기호이면서,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할 때 발현하는 고유한 정서를 응축한다. 그리고 이는 드로잉을 통해 보여주는 분방한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는 주로 종이 위에 그려진 이미지와 더불어, 종이를 오리고 자르는 컷아웃 기법을 이용하여 드로잉을 제작한다. 종이 위에 생성한 이미지, 그리고 종이가 접히거나 붙여져 하늘거리며 이어지거나 잘려진 조심스런 모양들이 결합하면서, 그의 드로잉은 조각 같기도, 회화 같기도, 아니면 이 모든 것 같기도 한 구조물이 된다. 면과 선, 구김과 펼침, 겹침과 분절을 통해 평면과 입체를 동시에 보유한 이 구조물은 면과 면이 결합하여 입체가 되고, 면과 면이 이어지며 선이되는 상태를 통해 자연스레 수많은 굴절과 더불어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차원의 존재방식을 담지한다. 하여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뒤죽박죽의 상태, 즉 항성과 은하부터 건축과 정원, 구름과 대양이 모두 나의 신체적 감각의 형태로 되돌아올 때 도약하는 무수한 겹침과 펼침이 된다.


주목해 할 것은, 이번 전시 작품의 제목이 모두 알파벳과 그로 시작하는 말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전시장의 가장 첫 번째 걸려 있는 <H for Heavy Raindrops>와 <H for Holiday Spirit>는 같은 H이지만, H로 시작되는 Heavy Raindrops, Holiday Spirit라는 경험과 함께 폴리포니의 화음과 같이 구축되기 시작한다. 마치 건물을 위한 자재가 건축가에 의해 세워지고 덮여지면서 건축물이 만들어지는 것과 같이, 이미지와 형상의 구축을 거친 다음에야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는 각각의 회화는 작가의 정서로 축조한 다차원의 이미지가 된다. 김겨울의 작업이 지닌 이러한 구축성은 한자(漢字)가 상형을 기반으로 파생되고, 부수 각각의 개념을 통해 결합되거나 독립하는 표의문자의 형성과도 유사하다. 드로잉을 예기하며 각기 흩어진 의미와 경험은 마치 글자들이 만들어지듯이, 쓰기와 그리기의 행위를 동시에 포용한 채로 조합되어 쌓인다. 몇몇 작품에서는 알파벳 문자조차 의미를 탈각한 채, 형상의 요소로 환원되어 확고한 언어의 체계를 유연한 형태학으로 변모시키고, 또한 색과 형, 종이와 커팅이 맞물려 형성된 조밀한 변화는 탈문자적인 이미지의 기호로 재발견 된다.


따라서 김겨울의 드로잉은 작품 자체의 개별적 사이즈에는 소극적 면모를 보이지만, 흰벽을 가로지른 작품 각각의 어휘로 벽 위에 새긴 신비한 문장처럼 긴 호흡으로 이어진다. 보편적 언어로는 턱없이 불충분한 우리의 무한한 감각적 가능성을 언어의 습성을 빌려 탈언어화 하는 그의 방식은 이미지로 앗상블라주 한 회화적 표기의 행렬을 만든다. 육중한 캔버스의 평면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분방한 자유로 구성된 그의 드로잉은 자신이 체험한 세계가 지닌 감각적 중량을 비옥한 종이의 물성과 조형의 통로를 거쳐 드러낸다. 예컨대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작품이라 할 수 있는 <A for A Sip of Water>처럼, 단지 물 한 모금이 휩쓸리는 거대한 파도의 역동성을 띨 수 있는 것은, 신체가 감각하는 규모의 역설이자, 속삭이는 웅변의 음향으로 다가온다.

 

Works

카카오톡 채널 채팅하기 버튼